커리어그랜드슬램 리디아 고, 이민지, 전인지 3파전
명예의 전당 고진영, 넬리 코다 경쟁
최고의 선수만 가능한 골퍼들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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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교포 이민지가 KPMG위민스PGA챔피언십에서 우승한 뒤 트로피에 입을 맞추고 있다./ AP. 뉴시스 |
[더팩트 | 박호윤 전문기자] 호주 교포 이민지가 올시즌 LPGA투어 세번째 메이저대회인 KPMG 위민스PGA챔피언십(총상금 1,200만달러)에서 4언더파 284타의 기록으로 우승했다. 강풍과 폭염, 그리고 정상급 선수들이 너도나도 불평을 터뜨릴 만큼 어려웠던 코스 세팅이었지만 이민지는 이러한 ‘3중고(三重苦)’를 이겨내고 자신의 투어 11승째이자 세번째 메이저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민지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커리어 그랜드슬램 달성과 나아가 명예의 전당 헌액"이라는 자신의 목표이자 욕심을 숨기지 않았다. 지난 2021년 아문디 에비앙챔피언십에서 첫 메이저 우승컵을 거머쥐었던 이민지는 2022년 US여자오픈에 이어 이번에 위민스PGA챔피언십 트로피 마저 들어 올림으로써 커리어 그랜드슬램에 한발짝 더 다가섰다. 이제 이민지는 앞으로의 선수 생활 중 AIG위민스챔피언십 또는 셰브론챔피언십을 차지할 경우 선수 최고의 명예랄 수 있는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게 된다.
투어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부분의 선수들은 우선 단기적으로는 단일 대회 우승, 나아가 시즌 상금왕이나 올해의 선수를 목표로 하나 궁극적으로는 명예의 전당 헌액과 더불어 그랜드 슬램을 입에 담는다. 달성 여부를 떠나 선수들 모두에게 도전의식을 고취시키는 하나의 꿈이자 희망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랜드슬램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달성할 수 있을까. 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 위해선 얼마만 한 업적을 쌓아야 하는 것일까.
우선 LPGA투어에서 말하는 그랜드슬램이란 단일 시즌에 펼쳐지는 5개의 메이저대회 중 서로 다른 4개의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을 말한다. PGA투어의 경우는 4대 메이저대회(마스터스, PGA챔피언십, US오픈, 디 오픈)를 그랜드슬램의 기준으로 삼는 반면 LPGA는 5대 메이저 대회 시스템으로 진행되고 있어 약간 다르다.
LPGA투어는 1982년 이전에는 시기에 따라 메이저대회가 2~4개로 열리다 1983년부터 4대 메이저 체제가 됐으며 2013년 에비앙챔피언십이 메이저로 합류,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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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비가 2015년 리코위민스브리티시오픈에서 우승한 뒤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박인비는 이 대히 우승으로 커리어그랜드슬램을 완성했다. /AP.뉴시스 |
단일 시즌에 메이저 대회를 싹쓸이하는 것을 의미하는 그랜드슬램은 사실상 불가능한 ‘신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남녀투어를 통틀어 단 한번도 달성된 적이 없으며 타이거 우즈가 2000년에 US오픈을 시작으로 디 오픈, PGA챔피언십 등 3개 메이저를 차례로 석권한 뒤 이듬해 마스터스에서 우승, 두 시즌에 걸쳐 4개의 메이저를 연속 우승한 것이 그랜드슬램에 가장 근접한 기록이다.(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타이거 슬램’이라 명명한 바 있슴)
따라서 특정 시즌과 상관없이 서로 다른 4개의 메이저를 우승하는 커리어 그랜드슬램이 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올시즌 PGA투어에서 로리 맥길로이가 마스터스를 우승하면서 역대 6번째 커리어 그랜드슬래머가 된 바 있다. LPGA에서는 그간 모두 7명의 커리어 그랜드슬래머가 탄생했다.
선사시대(?)라 할 수 있는 1950~80년대에 루이스 석스(1957년)를 시작으로 미키 라이트(1962년), 팻 브래들리(1986년)가 이름을 올렸고, 1990년대 이후 줄리 잉스터(1999년), 캐리 웹(2001년), 아니카 소렌스탐(2003년)에 이어 한국의 박인비(2015년)가 가장 최근에 커리어 그랜드슬램의 주인공이 된 바 있다. 이 중 캐리 웹은 2002년 위타빅스브리티시여자오픈(현 AIG챔피언십) 마저 우승, 5대 메이저를 모두 차지함으로써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슈퍼 커리어 그랜드슬래머’다.
◆역대 커리어 그랜드슬래머(7명)
루이스 석스, 미키 라이트, 팻 브래들리, 줄리 잉스터, 캐리 웹, 아니카 소렌스탐, 박인비
◆ 3대 메이저타이틀 우승자(현역 5명)
1. 이민지 : 에비앙챔피언십(21), US여자오픈(22), 위민스PGA챔피언십(25)
2. 리디아 고 : 에비앙챔피언십(15), 셰브론챔피언십(16), AIG챔피언십(24)
3. 전인지 : US여자오픈(15), 에비앙챔피언십(16), 위민스PGA챔피언십(22)
4. 안나 노르드크비스트 : 위민스PGA챔피언십(09), 에비앙챔피언십*17), AIG챔피언십(21)
5. 쩡 야니 : 위민스PGA챔피언십(08, 11), AIG챔피언십(10, 11) 셰브론챔피언십(10)
그렇다면 향후 박인비의 뒤를 이을 잠재적 커리어 그랜드슬래머는 누가 있을까. 이민지와 더불어 각각 이미 서로 다른 3개의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 1개만 더 수집하면 되는 현역 선수는 모두 5명(위 참조). 이 중 달성 가능성이 높은 선수는 교포 선수들인 이민지와 리디아 고, 그리고 한국의 전인지를 꼽을 수 있다.
18, 19살 때인 2015, 16년에 이미 두 개의 메이저 타이틀(에비앙, 셰브론)을 따낸 바 있는 리디아는 지난해 AIG챔피언십을 석권, 앞으로 US여자오픈과 위민스PGA챔피언십 중 하나를 거머쥐면 대망의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게 된다. 전인지도 셰브론챔피언십이나 위민스PGA챔피언십 중 하나면 된다. 이 들 3명은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한창 때라 사상 8번째 커리어 그랜드슬램 달성의 유력 후보로 손꼽히고 있다.
반면 안나 노르드크비스트(스웨덴)와 쩡 야니(대만)는 불혹이 내일모레인 노장들이라 현실감이 좀 떨어지는 편. 오히려 아직 메이저 타이틀이 2개지만 세계랭킹 1위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는 넬리 코다(미국)나 고진영의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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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리(왼쪽)가 2016년 10월 스카이72골프장에서 은퇴식을 가진 뒤 박찬호의 격려를 받고 있다. 박세리는 아시아 최초의 LPGA 명예의 전당 헌액자다./하나금융그룹 |
명예의 전당은 어떤가.
LPGA 명예의 전당은 1967년에 설립됐고 27점이라는 헌액 포인트 규정이 있다. 우선 메이저대회 우승과 베어 트로피(평균타수상) 및 올해의 선수상 중 적어도 1개 이상을 충족한 선수가 27포인트를 획득하면 자격을 갖추게 된다. 일반 대회 우승은 1점, 메이저는 2점이며 베어 트로피와 올해의 선수상도 1점씩 주어진다.
최근 투어 생활 10년 조항이 없어진 대신 올림픽 금메달에도 1점을 주는 것으로 변경됐다. 투어 생활 중 4~5차례 메이저 우승을 포함한다 해도 20승은 올려야 하며, 그 기간 베어트로피나 올해의 선수 등 시즌 최고 선수를 한차례 이상 해야 한다는 얘기다. 엄청나게 어려운 조건이다.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세계 여자골프의 트로이카로 활약한 아니카 소렌스탐, 캐리 웹, 박세리가 2003년부터 2년 간격으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그로부터 9년 뒤인 2016년에 박인비가 영광의 자리에 올랐다. 2020년대 들어서는 멕시코의 로레나 오초아가 2022년에, 그리고 지난해 리디아 고가 파리 올림픽 금메달로 마지막 27점째 포인트를 채움으로써 가장 최근의 명예의 전당 헌액자가 됐다.
앞으로 이들과 함께 명예의 전당에 액자를 걸 선수는 누가 있을까. 가장 근접한 선수는 대만의 쩡 야니. 2010년 즈음,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던 쩡 야니는 메이저 5승을 포함해 투어 15승을 기록 중이고 두차례의 올해의 선수상(2010, 11년)과 한차례 베어트로피(2011년)를 수상해 총 23점의 헌액 포인트를 기록 중이다. 현역 선수 중에는 가장 앞서 있다. 그러나 요즘은 풀타임 시드를 갖고 있지 못할 정도로 기량이 쇠퇴해 향후 4점을 추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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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영이 LPGA투어에서 샷을 날리고 있는 모습. 고진영은 명예의 전당 포인트 20점으로 현역 선수들 중 가장 유력한 헌액 후보다./AP.뉴시스 |
반면 현 세계랭킹 1위인 넬리 코다와 바로 직전 그 자리의 주인공이었던 고진영이 유력한 후보라 보는 게 타당한 시선이다. 고진영은 메이저 2승 포함, 15승을 기록 중이며 올해의 선수상 2회(2019, 21년), 베어트로피 1회(2019년)로 20점을 획득 중이다. 코다는 19점을 기록 중인데 역시 메이저 2승 포함, 15승과 올해의 선수(2024년) 및 올림픽 금메달(2020년)을 수상했다.
그렇다면 커리어 그랜드슬램과 명예의 전당 헌액 중 어느 것이 더 힘들까.
대회 숫자나 경쟁구도 등을 감안해 1990년 이후의 경우만 따져 보자.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줄리 잉스터, 웹, 소렌스탐, 박인비 등 4명은 예외없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반면 명예의 전당에는 들었지만 커리어 그랜드슬램과는 인연을 맺지 못한 선수는 베스 대니얼과 박세리, 오초아, 리디아 고 등 4명. 리디아는 아직 가능성이 많지만 앞의 셋은 이미 은퇴한 지 한참됐다.
통산 33승(메이저 1승)을 한 대니얼과 27승(메이저 1승)의 오초아, 그리고 25승(메이저 5승)의 박세리가 못한 것을 보면 커리어 그랜드슬램이 어려운 듯 보이고, 1년에 평균 3점씩을 획득한다 해도 무려 9년 이상을 지속해야 27점이 가능한 것을 보면 명예의 전당이 더 힘들어 보이기도 한다. 비교 자체가 무의미 하달까. 결론적으로 둘 다 말도 안 되게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