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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의 인생 후반전] 셔틀콕 황제서 협회장까지… 김동문이 꿈꾸는 韓 배드민턴의 찬란한 미래

‘셔틀콕의 황제’ 협회장 부임 4개월 째
최고의 생활체육 인프라 갖춘 종목
시대에 맞는 시스템 교체가 내 임무

유년시절 가난 벗어나려 라켓 잡아
고교 1학년 때 주니어 대회서 우승컵
꾸준히 태극마크… 국제대회 휩쓸어
은퇴 후 모교서 후진 양성하다 도전


김동문 대한배드민턴협회장이 한국 배드민턴 발전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선수와 교수, 해설위원을 모두 경험한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배드민턴이다.
최근 서울 송파구 배드민턴협회 사무실에서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와 만났다.
사진=김두홍 기자

“배드민턴이 새로운 스포츠로 거듭나게 만들고 싶어요. 결정권자 자리에 있는 제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배드민턴 라켓과 셔틀콕 하나 그리고 함께 짝을 이룬 동료가 있으면 세계가 두렵지 않았다.
1996 애틀랜타 올림픽 혼합복식 금메달과 2004 아테네올림픽 남자복식 금메달, 세계선수권대회, 아시아선수권대회, 아시안게임을 모두 제패했다.
14개 대회 연속 우승, 역대 최다인 76승이라는 화려한 업적을 남겼다.

지금의 안세영(삼성생명)이라는 슈퍼스타가 이름을 날리기 수십 년 전 쟁쟁한 스타들이 자웅을 겨뤘던 시절, 우뚝 선 배드민턴의 영웅이었다.
이제는 한국 배드민턴 전체를 총괄하는 대한배드민턴협회장이라는 직함을 단 ‘셔틀콕의 황제’ 김동문이다.
지난해 국민적 지탄을 받은 배드민턴협회를 구하기 위해 과감하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지난 2월 협회장에 취임해 어느덧 4개월을 맞이했다.
갈 길이 멀다.
김 회장은 “배드민턴은 최고의 생활체육 인프라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배드민턴이 국민 스포츠로 남을지 아니면 더 새로운 스포츠로 거듭날 수 있을지는 제게 달렸다”며 “지금 시대에 맞게 시스템을 바꿔놓는 게 제 임무”라고 힘줘 말했다.

김동문 대한배드민턴협회장이 인터뷰 중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김두홍 기자

◆가난했던 어린 시절, 배드민턴이 탈출구였다
세계를 호령한 배드민턴 스타였지만 어린 시절만 해도 형편이 좋지 않았다.
김 회장은 4남 2녀 중 막내였다.
어머니는 노점상을 했다.
시장에서 리어카를 끌며 장사를 해 가족을 먹여 살렸다.
학교 소풍 때 김밥 한 줄도 싸가지 못할 정도로 어려웠다.

배드민턴은 가난의 탈출구였다.
그는 “지금으로 치면 기초생활수급자였다.
벗어나고 싶다는 어릴 때부터 많이 했다.
창피하기도 했다”며 “경제적으로 성공할 방법이 무엇이 있을지 생각했다.
그때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중계를 봤는데 복싱 선수들이 ‘나 챔피언 먹었어’라며 인터뷰를 했다.
운동선수로 성공하면 집안에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돌아봤다.

다니던 초등학교에는 야구부와 배드민턴부가 있었다.
야구는 고가의 장비를 개인이 마련해야 해 어려웠지만 배드민턴은 거의 모든 장비를 지원해 줬다.
배드민턴이 하고 싶었다.

다행히 꼬마 김동문은 팔 힘이 강했다.
반에서 팔씨름 1등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초등학교 3학년 당시 배드민턴부에 들어가려면 달리기가 빨라야 했다.
너무나도 하고 싶었던 그는 한 달 내내 배드민턴부를 ?아다녔고 결국 감독 눈에 들면서 라켓을 쥐게 됐다.

선수 시절의 김동문 대한배드민턴협회장(오른쪽). 사진=대한배드민턴협회 제공

배드민턴을 늦게 시작한 만큼 후보 생활도 길었다.
그러다 고1 때 키가 10cm 넘게 자라면서 기회가 왔다.
고1 겨울에 주니어 국가대표로 처음 발탁이 됐고 처음 출전한 주니어 대회에서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이후는 승승장구였다.
성인 국가대표에 발탁이 됐고 태극마크를 놓치는 일은 없었다.

2004 아테네 올림픽을 끝으로 은퇴했다.
새 인생을 설계해야 했다.
캐나다 유학을 결정했고, 이후 모교인 원광대에서 스포츠과학부 교수로 교편을 잡았다.
배드민턴 현장에서는 살짝 떨어져 있었지만, 마음은 늘 셔틀콕과 함께했다.
배드민턴 중계방송 해설위원으로 활동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는 배드민턴협회장 도전의 계기가 됐다.
선수 시절 한국 배드민턴의 중심에 있었고, 은퇴 이후 한걸음 물러서 바라봤다.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부족한지 보이기 시작했다.

김동문 대한배드민턴협회장. 사진=김두홍 기자

◆배드민턴을 향한 끝없는 고민
부임하자마자 정신없이 4개월을 보냈다.
쉴 틈이 없었다.
메인 스폰서 유지부터 각종 사업 예산을 따내기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뿐만 아니다.
평일에는 협회와 원광대를 오가며 업무도 보고 수업도 했다.
주말에는 지방 생활체육 현장을 방문했다.

하나씩 해결해 나갔다.
가장 큰 행보는 국가대표 선수 개인용품 후원 계약을 공식적으로 허용한 일이다.
후원금 규모가 줄어들지만 선수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한 결과다.
그 동안 국가대표 선수들은 협회 후원사의 용품만 써야 했는데 안세영이 이를 지적해 공론화된 바 있다.
김 회장은 “아직 후원사와 구체적인 최종 계약서는 안 썼지만 이미 선수들은 개인 계약을 한 상태다”라고 밝혔다.

줄어드는 후원금은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보완하려고 한다.
그는 “관련 컨설팅을 받고 있다.
대행사를 끼지 않고 내부적으로 홍보, 마케팅, 후원사 유치 등을 총괄하는 전담 부서를 만들려고 한다.
선수들을 잘 활용하면 수입을 늘릴 방안이 분명히 있을 거다.
잘 활용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장기적인 계획도 가지고 있다.
국제대회와 달리 덜 관심을 받는 국내대회를 좀 더 활성화겠다는 목표다.
현재 실업리그를 향후 프로리그로 전환, 관람스포츠로 만들어 팬덤을 확장하겠다는 것이다.

김 회장은 “안세영이 국내대회에서 뛰는 모습을 거의 못 보지 않나. 배드민턴이 국제대회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동호인들은 그들끼리의 배드민턴을 즐긴다.
다 분리돼 있는 느낌이다”라고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배드민턴 동호인이 200만명이다.
다 관람객들이 될 수 있다.
이들을 관람스포츠로 끌어들일 방법을 마련하려고 한다.
국제대회에 나서는 선수들이 유입되고 새로운 대회 방식으로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한국실업배드민턴연맹하고도 협력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배드민턴도 프로야구처럼 주말에 각 지역에서 대회가 열려야 한다.
그래야 팬덤도 만들고 중계권, 광고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시너지가 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선수 시절의 김동문 대한배드민턴협회장(오른쪽)과 라경민 한국체대 교수. 선수 시절 혼합복식에서 호흡을 맞춘 둘은 부부가 됐다.
사진=대한배드민턴협회 제공

◆나를 있게 한 배드민턴
온통 머릿속에는 배드민턴뿐이다.
그렇게 40년을 달려왔다.
선수와 교수, 해설위원 그리고 배드민턴협회장까지, 심지어 결혼도 배드민턴 선수(라경민 한국체대 교수)와 했다.

그는 “저를 이 자리까지 있게 한 게 배드민턴이다.
지금까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고 이 길을 좇아서 왔다”며 “다음 목표가 없으면 나태해질 수 있다고 늘 경계한다.
그래서 지금 앞에 놓인 협회장이라는 일을 자연스럽게 맡게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말했다.

금메달리스트라는 영광의 무게를 잘 알고 있다.
김 회장은 “내겐 메달리스트라는 이미지가 있다.
보는 눈이 많다.
항상 잘해야 하고 실수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정말 뭐든지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
심지어는 남들과 골프를 치러가도 최선을 다했다”며 “대충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다”고 미소 지었다.

김동문 대한배드민턴협회장. 사진=김두홍 기자

협회장을 하는 마음가짐도 똑같다.
김 회장은 “배드민턴 인생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주변에서는 농담으로 협회장 선거에 나간 게 운명이라고 하더라. 결국 내 사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역량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그 동안 배드민턴 한 길만 걸어왔다.
더욱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하겠다”고 눈빛을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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