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소송 통해 '노태우 비자금' 의혹 불거졌지만 규명 아직
정권 교체로 수사 속도 붙을까…"이재명 대통령 힘써달라"
![]() |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이 지난해 4월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이혼 소송 항소심 2차 변론기일을 마친 뒤 취재진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더팩트 DB |
[더팩트ㅣ이성락 기자] 세기의 이혼 소송을 통해 노태우 전 대통령 일가의 불법 비자금 은닉 의혹이 불거진 지 1년이 지났다. 그러나 아직 비자금 실체 규명은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간 노 전 대통령 일가에 대한 비판 목소리를 낸 시민단체는 정권 교체로 인한 판도 변화에 기대를 거는 모습이다.
11일 재계와 법조계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의 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이혼 소송 항소심 판결이 나온 지 약 1년이 흘렀다. 이는 '노태우 비자금' 의혹을 밝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진 시점으로부터 1년째가 됐다는 말이다. 앞서 항소심 재판부는 지난해 5월 말 최 회장이 노 관장에게 재산분할로 1조3808억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고, 그 직후 1심과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 배경으로는 '노태우 비자금 메모'가 거론됐다.
당시 노 관장 측은 '선경 300억'이라고 적힌 모친 김옥숙 여사의 메모를 제시하며 '이 돈이 기업 성장의 종잣돈이 됐기 때문에 노 관장의 기여가 있다고 봐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전까지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던 선경건설(현 SK에코플랜트) 명의 약속어음(50억원짜리 6장)도 증거로 제출했다. 이혼 소송에서 이기기 위해 비자금의 존재를 스스로 알린 셈이다. 최 회장 측은 노 전 대통령에게 300억원을 받은 사실이 없으며, 노 전 대통령 퇴임 후 활동비를 요구하면 주겠다는 약속이었을 뿐이라고 반박했으나,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항소심 재판부가 은닉에 성공한 범죄 수익을 판결의 기초로 활용한 점, 확대 인정된 노 관장의 기여분 등은 또 다른 논란을 야기했다.
노 관장이 비자금의 존재를 알린 건 추징금 완납 이후 더 이상 비자금 관련 수사·추징이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읽힌다. 물론 비자금 의혹과 관련한 거센 비판은 피할 수 없게 됐다. 실제로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노 전 대통령 일가의 부정 축재 은닉 재산의 실체를 밝혀야 한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결과적으로 1년 동안 의혹 규명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 사이 노 전 대통령의 아들 노재헌 이사장이 이끄는 동아시아문화센터 등을 통해 은닉 자금이 계속 흘러 들어가고 있고, 이 자금이 세탁돼 노 전 대통령 일가의 배를 불리고 있다는 주장이 지속해서 제기됐다. 비자금 규모가 1000억원 이상에 달할 것이란 관측도 나왔다.
![]() |
원순석 5·18기념재단 이사장(왼쪽)이 지난해 10월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민원실 앞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 일가에 대한 고발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뉴시스 |
시민단체는 일찌감치 고발 조치했다. 다만 지난 4월 검찰이 노 전 대통령 일가의 금융계좌를 추적하며 자금 흐름을 파악하고 있다는 내용 외 이렇다 할 진척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지난해 10월 김 여사와 노 관장, 노 이사장을 조세범 처벌법·범죄 수익 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 등으로 대검찰청에 고발했던 5·18기념재단은 "'노태우 비자금' 관련 고발 이후 피고발자 소환 조사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최근에서야 일가의 금융계좌를 확보해 흐름 파악에 착수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며 "부정 축재, 불법 은닉된 재산이 아무런 제재 없이 후손에게 이전되는 것을 검찰이 방관한다면, 이는 또 한 번 12·12를 성공한 쿠데타로 만드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치권에서도 '노태우 비자금' 문제를 다루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지난해 10월 국정감사를 통해 비자금 환수와 관련자 수사 필요성이 논의됐다. 당시 법제사법위원회 국감에 출석한 심우정 검찰총장은 "법과 원칙에 따라 검토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12·3 비상계엄과 탄핵 국면, 조기 대선 등을 거치며 '노태우 비자금' 문제가 한동안 정치권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됐다는 해석이 나온다.
지난 1년간 비자금 의혹에 대한 노 전 대통령 일가의 해명은 없었다. 노 관장과 노 이사장 등은 국감 증인으로 채택됐으나 뚜렷한 이유 없이 불출석했고, 오히려 국감 기간에 노 전 대통령 서거(2021년 10월 26일) 3주기 추모 행사를 챙겨 강한 질타를 받기도 했다. 노 이사장은 '노 전 대통령 서거 3주기 추모를 위한 심포지엄', '만화로 읽는 인물이야기, 대통령 노태우 출판기념회' 등에서 <더팩트> 취재진과 만났으나, 비자금 관련 질문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시민단체는 이제라도 의혹을 낱낱이 규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들이 기대를 거는 대목은 정권이 달라진 점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군사정권의 비자금 문제에 대해 단호한 입장이었다.
군사정권범죄수익국고추진환수위원회는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을 앞두고 '노태우 비자금' 등 군사정권 과거사를 끝까지 해결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제 군사정권 과거사 청산을 최우선으로 해결해야 한다"며 "이제야 '노태우 은닉 비자금'의 실체가 드러날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 이 대통령이 신속하고 엄정한 수사가 진행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했다.
rocky@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