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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 초월한 상상력… 넓고 두터워진 韓 SF소설 스펙트럼

SF신작 들고 돌아온 김보영·배명훈 작가
김보영 단편 소설집 ‘고래눈이 내리다’
파괴된 바다 속 생물들의 목소리 통해
생태계 파괴·인간 자멸의 연쇄 그려내
단편작 ‘귀신숲이 내리다’도 함께 수록
배명훈 장편소설 ‘기병과 마법사’
서양 중세시대 배경 소설에 등장하는 ‘기사’
한반도 국제관계사 맥락에 맞춰 변용시켜
숨겨진 힘 발견한 주인공의 원정 과정 그려


지난 10여년 사이 한국 SF소설의 스펙트럼은 넓고 두터워졌다.
김보영·정보라 작가는 국산 SF의 영토를 해외로 넓혔고, 듀나·배명훈 작가는 한국적 맥락에서 토착 SF가 뻗어 나갈 영역을 탐구하며 저마다의 집을 지었다.
김초엽·천선란·정세랑 작가는 대중 시장을 개척해 SF를 보편 소설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이들 덕에 2010년대 중후반 이후 한국 SF소설 시장은 더는 소수 마니아만의 판이 아니게 됐다.

현재를 한국 SF의 중흥기라 본다면, 그 바탕의 토양을 튼튼히 일구며 장르 번성을 이끈 주역으로 김보영과 배명훈을 빼놓을 수 없을 테다.
각각 데뷔 21주년·20주년을 맞은 두 작가가 나란히 신간을 발표했다.

김보영 작가(왼쪽), 배명훈 작가.
◆비인간 생명체의 눈으로 서술한 ‘인간이라는 재해’

바다 온도는 높아져만 가고, 증발은 멈추지 않는다.
풍요의 바닷속 번성했던 온갖 생물은 거의 다 씨가 말랐다.
썩지 않는 물질을 바다에 배설하는 괴물, 공기를 뜨끈뜨끈하게 만드는 원흉. 바로 인간이라는 기이한 종이 벌인 재앙이다.

“그들은 먹을 수 없는 유독물을 매일 수천 톤씩 배설해 대양에 버린다.
심해는 그나마 피해가 적지만 조금만 윗동네로 가도 무시무시한 전염병이 연이어 창궐하고, 산호처럼 귀한 목숨들이 어처구니없이 사라진다.
”(17쪽)

‘지구에 인간만 한 자연재해는 없다’고 김보영 소설 속 화자들은 말한다.
19일 출간된 김보영 단편 소설집 ‘고래눈이 내리다’(래빗홀)의 동명 표제작은 심해 생물들의 목소리를 통해 생태 파괴와 인간 자멸의 연쇄를 그려낸다.

책에는 이 작품과 짝을 이루는 단편 ‘귀신숲이 내리다’도 수록됐다.
인간이라는 재해 탓에 파멸을 맞은 세계, 온갖 변종 균사체로 뒤덮인 채 버려진 우주 거주구에서 자라나는 버섯과 산호의 목소리는 분노에 가득 차 있다.
이들의 분노와 생명력은 모든 것이 불타고 녹아버린 인간 없는 세계에 새 숲을 틔울 회복의 실마리를 상상하게 한다.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썩지 않는 것들. 내가 다 썩게 하리라 (…) 인간이 만든 것들을 다 집어삼킨 뒤 땅에 단단히 뿌리를 내릴 것이다.
(…) 내 귀신 들린 숲이 너희를 남김없이 잡아먹고 자라나리라.”(257∼258쪽)

책은 김보영이 5년 만에 내놓은 소설집이다.
수록작 9편 중 한 편을 제외하면 작가가 2020∼2024년 사이 계간지 등에 발표한 신작이다.
익숙한 인간적 경험을 낯설게 드러내 인간 중심 세계관을 새로 보게 하는 시의적절한 상상력이 높은 밀도로 들어차 있다.

주제의식이 크고 무거운 작품 사이사이 비교적 가벼운 작품이 섞여 있지만, 작품별 완성도의 편차는 작다.
세상의 용량이 부족해져 가상현실로 이주한 인류가 또다시 난개발을 벌인 나머지 세계의 데이터 일부를 지워야 하는 선택 기로에 놓인 상황을 설정한 ‘너럭바위를 바라보다’는 효율성과 쓸모의 문제를 유머러스하게 묘파한 작품이다.

김 작가가 봉준호 감독 영화 ‘설국열차’의 자문을 맡으며 기획한 단편 ‘새벽 기차’(2013)는 자전 속도가 느려 육지가 적도 부근을 따라 형성된 행성이라는 독특한 배경을 설정해 눈길을 끈다.
‘저예산 프로젝트’는 게임회사 시나리오 기획자로 경력을 시작한 작가의 체험이 담긴 따스한 작품이다.

◆학문하는 자세로 길어올린 ‘여기가 원본인 판타지’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 전쟁물을 읽고 감명받아 습작해 본 사람이라면 안다.
극 중 정치·경제 상황과 무기·마법 따위의 세계관 설정을 시작하기도 전에, 주인공을 누구로 내세울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을. 파란 눈 금발 백인 ‘크리스토프’나 ‘라파엘’을 등장시키는 건 그럴듯하지만, 주인공 ‘박철수’, ‘김미선’을 통해 한국 땅을 배경으로 판타지 세계관을 펼쳐 보이는 건 어쩐지 쑥스럽고 어색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격다짐으로 ‘크리스토프’를 앞세우기엔 그와 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가로놓여 있다.

배명훈은 장편소설 ‘기병과 마법사’에서 이 위화감을 정면으로 돌파한다.
작품은 가상의 시공간을 상정하나, 중세 한반도 북부 너머의 북방 초원지대를 연상시킨다.

주인공은 영민한 스물일곱 살 여성 ‘영윤해’. 폭군 치하, 왕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숨죽여 살던 윤해는 잔인무도한 약혼자의 계략으로 죽을 위기에 처한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알 수 없는 목소리를 듣고 숨겨진 힘을 발견한 윤해는 마법으로 목숨을 건진다.
이 사건으로 원한을 산 윤해는 북방지역 술름으로 유배와 다름없는 원정을 떠난다.
소설에서 ‘마목인(馬木人)’으로 불리는 기병 ‘다르나킨’을 그곳에서 운명의 짝으로 만난 마법사(윤해)는 엄혹한 시대와 대적해 자신과 세계를 구하는 싸움을 펼친다.

배 작가는 판타지라는 장르의 관습을 따르면서도 서양 중세 배경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기사’를 한반도 국제관계사의 맥락에 맞춰 변용한다.
기병 다르나킨은 이러한 재창안 노력의 결과물이다.

배 작가는 “한반도 지역의 기병에 관한 역사학과 군사학 분야 논문 서른 편 정도를 추려 정독하는 동안 소설의 주인공이 발을 딛고 설 사회문화적 배경이 머릿속에 그려졌다”고 밝혔다.

서울대 외교학과 학부·대학원을 졸업하고 한 연구기관에서 일하다 SF를 발표하기 시작한 그가 학문하는 연구자의 자세로,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밀어붙인 상상력이기에 개념적 구조는 탄탄하고 인물과 서사에는 어색한 구석이 없다.
고증으로 재미와 사실성을 동시에 잡은 긴박한 기병전과 전장의 수싸움 묘사는 압권이다.

요컨대, ‘기병과 마법사’에는 우리 문화권에서 통용될 만한 판타지 세계,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바로 여기가 원본인 판타지”를 고안할 경우 그 세계와 인물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성실하고도 촘촘하게 담겨 있다.
이규희 기자 lk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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