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은 식량 과잉… 한쪽에선 굶주림
기술혁신으로는 ‘배고픔’ 해결 못해
음식 쓰레기 감소·육류 소비 절제 등
작은 실천 통한 식량 체계 개선 제안
음식은 넘쳐나고 인간은 배고프다/ 바츨라프 스밀/ 이한음 옮김/ 김영사/ 1만9800원
1인당 하루 약 3000㎉를 섭취할 수 있을 만큼의 식량이 전 세계에서 생산된다.
전 인류를 먹일 수 있는 양이지만, 놀랍게도 그중 3분의 1인 1인당 약 1000㎉가 음식물 쓰레기로 낭비된다.
일부 부유한 국가에서는 낭비되는 식량 비율이 45%에 달한다.
식량 유통 시스템은 실패하고, 정책은 역효과를 내며, 식량은 필요한 곳으로 가지 않는다.
그런데도 인류를 먹여 살리기 위한 세계적 논의는 농업 생산성을 높여 더 많은 식량을 산출하자는 데 집중된다.
씨앗과 토양을 개량하고, 농업 관행을 개선하고, 가축 생산성을 높이자는 주장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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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츨라프 스밀은 식량 과잉과 기아가 공존하는 모순 해결의 실마리로 혁신기술이 아닌 점진적 실천과 분배의 효율화를 제시한다. 에너지·식량·환경 분야 석학인 그는 방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식량 시스템을 날카롭게 통찰하며, 이를 통해 지속 가능한 생존 방식에 대한 성찰을 촉구한다. 게티이미지뱅크 |
그는 우리 시대의 가장 시급한 과제 중 하나로, 모두가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을 수 있도록 하는 문제의 핵심은 기술 혁신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이미 우리는 세계를 먹여 살릴 만큼 충분한 음식을 생산하고 있다.
진짜 풀어야 할 과제는 음식이 생산된 후에 일어나는 일들이라고 한 그는 음식물 쓰레기 감소와 포장 개선, 육류 소비 절제 등 실용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저자는 수십 년에 걸친 연구와 저술을 통해 에너지·농업·공공 건강 분야에서 도전적 질문을 다뤄왔다.
그의 무기는 철저한 데이터 기반 접근 방식으로 식량 안보 문제를 분석하는 방식이다.
최선의 시나리오나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하는 일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거창한 예측을 하는 대신, 복잡한 문제들을 측정 가능한 데이터로 분해하고 숫자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설한다.
이러한 방법론은 “숫자는 희망적인 사고에 대한 해독제”라고 적힌 서문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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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츨라프 스밀/ 이한음 옮김/ 김영사/ 1만9800원 |
그가 신뢰하는 건 오로지 점진적 변화의 힘이다.
예를 들어, 전체 곡물 생산량의 약 3분의 1이 가축 사료로 사용되고, 이것이 다시 육류 소비로 이어지는 작금의 생산·소비 고리가 식량 생산 지속 가능성을 위협하고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막대한 에너지·물·화학비료가 인간이 아니라 동물의 먹이로 쓰여 분배 비효율과 온실효과를 가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대안으로 거론되는 비건주의나 배양육·식물성 대체육 따위가 해답이 될 거라고 보지 않는다.
비건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며, 대체 육류가 시장에서 큰 비율을 차지할 가능성이 작다고 보기 때문이다.
저자는 현실적으로 확률이 낮은 파격적 대안에 기대를 걸지 않는다.
부유한 나라의 현재 높은 동물성 식품 소비율을 줄이고 섭취하는 육류의 조성을 사료 수요가 낮은 환경친화적인 종류로 대체하자는 절충적 접근을 제안한다.
쇠고기 대신 가금류나 양식 어류를 선택하고, 섭취 빈도를 줄이는 것만으로 식량 시스템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이다.
이와 관련, 그는 “무엇보다도 분명히 해낼 수 있는 일”이며 “영양을 충분히 공급하는 데 아무런 지장도 주지 않으면서, 생산자에게 갑작스러운 경제적 손실을 입히지 않으면서 해낼 수 있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전 세계 인구 증가에 따라 식량을 지속 가능하게 공급하는 문제를 다룰 때도 같은 접근법을 취한다.
유엔 전망에 따르면 2020∼2050년 인구가 약 19억명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그중 아프리카가 60%를 차지하고,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 비율은 50% 남짓이다.
이 지역은 기존 집단의 영양 결핍 상태를 완화하기 위해 식량을 더 생산해야 하는 한편 10억명을 추가로 먹여 살려야 한다.
획기적인 해답으로 보이는 주장은 홍수처럼 쏟아진다.
식량 생산을 유기적으로 전면 전환해 이상적인 식량 생산 체계를 복원하자거나 유전자 변형 식량 작물을 개발하자는 제안, 노동력과 투입량을 줄이는 새로운 경작 방식을 창안하자는 등의 제안이 대표적이다.
개중에는 무비판적 열광을 받는 주장들도 있다.
그러나 저자가 보기에 이 모든 ‘전환’의 제안은 2050년까지 식량 체계를 바꾸는 데 실질적으로 기여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하는 일은 물론 중요하지만, 세계 인구가 90억명을 넘어선다면 농업 생산성 향상만으로 굶주림과 영양실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신 저자는 인류가 이미 생산하는 식량을 덜 낭비하는 일에 집중하자고 말한다.
음식물 쓰레기 절감이 대표적이다.
식료품 포장의 크기나 종류를 바꿔 음식물 쓰레기가 되기 전에 각 가정에서 소비할 수 있도록 하고 내용물 보존이 더 잘되도록 하는 것 같은 단순한 방법만으로도 효율을 높일 수 있다.
더 나은 저장과 포장, 더 스마트한 공급망이 낭비를 크게 줄일 수 있다는 주장은 일견 소박한 담론으로 보이지만, 인류의 목표가 단순히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먹이는 것이 돼야 한다면 신뢰할 만하다.
스밀은 빌 게이츠가 사랑하는 사상가로도 유명하다.
식량 생산과 농업, 에너지를 거시적으로 다룬 그의 저작들은 게이츠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게이츠는 지난해 출간된 이 책을 읽은 뒤 길고 세심한 리뷰를 자신의 블로그에 이렇게 남겼다.
“바츨라프는 우리가 기술적 기적에만 의존할 수 없다고 경고하며, 나도 그에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크리스퍼 같은 혁신이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다고도 믿는다.
(…) 중요한 것은 장기적인 혁신과 우리가 즉시 구현할 수 있는 실용적인 해결책을 균형 있게 적용하는 것이다.
”
이규희 기자 lk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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