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생각은 그동안 인간만의 전유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챗GPT, 제미니(Gemini), 퍼플렉시티(Perplexity) 등 대형언어모델(LLM)이 사람처럼 대화하고 심리 상담을 해주며, 그림이나 영상까지 제작하는 현재 상황에서는 지능과 의식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 다시 제기될 수밖에 없다.
신간 ‘뇌 없이도 생각할 수 있는가’는 뇌를 가진 유기체로서의 인간 중심 사고에서 벗어나, ‘식물지능’을 통해 ‘살아 있는 지능’의 개념을 다시 성찰할 것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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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코 칼보/ 하인해 옮김/ 휴머니스트/ 2만2000원 |
만약 식물의 결정이 단순했다면, 지금처럼 복잡한 지구 생태계에서 풍요로운 종 다양성을 이루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뇌도 신경도 없는 식물의 사고는 몸 전체에 ‘분산’되어 작동한다.
낮의 길이와 계절 변화, 기온과 습도, 진동과 염도, 시간에 따른 영양 성분 변화, 토양 내 미생물, 이웃과의 경쟁 등 수많은 환경 정보를 온몸으로 수집하고 판단해 반응한다.
뇌는 없지만 전기신호를 전달하는 관다발계가 있어 동물의 신경계처럼 물과 당, 신호 물질 등을 이동시키며 정보를 주고받는다.
식물에서 발견되는 세로토닌, 도파민, GABA, 글루탐산염 등은 인간의 신경전달물질과 동일하다.
상처 입은 부위에서 전기신호가 발생해 몸 전체로 퍼지며 방어 기제가 작동하는 방식은 동물이 통증에 반응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인간 중심의 의식 모델이 중심 제어식이라면, 식물은 네트워크 기반의 분산형 사고 체계인 셈이다.
마취를 예로 들어보자. 포유류를 일시적으로 잠재우려면 합성 마취제를 써야 하지만, 식물은 다양한 종류의 마취제를 스스로 만들어낸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에틸렌 같은 마취성 화학물질을 공기 중으로 방출하고, 뿌리에 수분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면 에탄올과 에틸렌, 디비닐에테르 등을 생성한다.
세계 최초의 식물 신호전달 및 행동철학연구소인 ‘민트’(Minimal Intelligence Laboratory·MINT) 소장인 저자는 통합정보이론과 생물기호학, 생태심리학 등 다양한 관점에서 식물의 행동을 해석하며, 인간과 기계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제3의 인지모델’로서 식물지능을 제안한다.
실제 스탠퍼드대와 캘리포니아대 샌타바버라 캠퍼스 연구자들이 식물처럼 환경에 맞춰 유연하게 자라나는 생체모방 로봇 ‘그로봇(Growbot)’을 개발하기도 했다.
공기압이나 액체 압력을 이용해 몸체를 확장하며 움직이는 소프트 로봇인 그로봇은 향후 재난 구조나 의료 시술, 복잡한 환경 탐색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 가능성이 기대된다.
식물처럼 느리고 신중하지만, 환경에 깊이 뿌리내리고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존재 방식은 기술 발전을 넘어, 인간이 삶의 방식으로도 배워야 할 태도라는 지적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정진수 기자 je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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