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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기계속에 아로 새겨진… 인간과 시간의 정교한 역사

전장 참호서 손목시계 만든 군인
라듐으로 숫자 쓰다 숨진 여성들
인간 손으로 만든 작은 장치 시계
역사·문명서 비극까지 품고 있어
인간의 야망·집념 결정체로 평가


시계의 시간/ 레베카 스트러더스/ 김희정 옮김/ 생각의힘/ 2만2000원

매일 우리 손목 위에서, 스마트폰 화면에서, 건물 벽면에서 시간을 알리는 것이 시계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이 작고 정교한 장치는 사실 인간의 역사, 문명, 기술, 철학, 심지어 비극까지 품고 있다.
시계 제작자이자 역사학자인 저자는 ‘시계의 시간’에서 시계에 얽힌 흥미롭고도 놀라운 이야기를 풀어낸다.
영국 역사상 최초로 시계학으로 박사 학위를 딴 저자는 각 시대를 통과해온 상징적인 시계들을 통해 인간이 시간과 맺어온 관계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시계 제작자의 꿈과 열정이 녹아있는 시계는 시간을 알려주지만, 동시에 시간과 싸워온 인간의 야망과 집념의 결정체임을 보여준다.
신간 ‘시계의 시간’은 시계 제작자가 들려주는 인간과 시간의 정교하고 찬란한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는 “시계는 시간을 알려주지만, 동시에 시간과 싸워온 인간의 야먕과 집념의 결정체”라고 말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책에 따르면 14세기 중세 유럽은 교회가 시간을 지배하던 시대였다.
해시계나 물시계 대신, 탑 위에 대형 기계식 시계가 등장한다.
초창기 이 시계는 지금처럼 시간을 정밀하게 표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종소리는 마을 사람들의 기도, 노동, 장터 등에서 사람들의 생활 리듬을 정했다.
모든 것이 시계탑 종소리에 맞춰 움직였다.
시계는 단순한 시간 관리의 수단이 아니라 신의 질서를 구현하는 장치였고, 교회는 그 질서를 통제하는 기관이었다.
시간을 지배하는 자가 권력을 가진다는 사실을 시계는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18세기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위해 제작된 시계는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기계식 시계로 꼽힌다.
제작자는 천재 시계공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 그는 800개가 넘는 부품과 최초의 자동 태엽 감기 메커니즘, 낙하산이라는 의미의 충격 완화 장치 ‘파라슈트(pare-chute)’, 지구 중력의 영향으로 발생하는 위치 오류를 상쇄하는 ‘투르비용(tourbillon)’ 장치, 주머니에서 꺼내지 않고 손으로 케이스를 만져 시간을 알 수 있는 ‘몽트레 아 탁트(montre a tact)’를 발명한 시계 제작의 천재였다.
하지만 오랜 제작 기간이 문제였다.
혁명과 왕정 붕괴의 혼란 속에서 시계는 완성되지 못했고,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그녀가 죽고 34년이 지난 뒤에야 시계는 완성됐다.
마리 앙투아네드의 시계는 인간의 기술적 야망과 정치의 무상함, 시간이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교훈을 주는 ‘전설적인 시계’로 후세에 기억된다.

책에는 라듐으로 숫자를 그리다 죽어간 여성들의 비극도 담겨 있다.
20세기 초 미국, ‘라듐 걸스’는 야광 시계를 제작하던 여성 노동자들을 말한다.
라듐은 당시 ‘신비의 물질’로 알려졌고, 시계의 숫자나 바늘에 이를 칠하면 밤에도 선명하게 빛났다.
여성 노동자들은 섬세한 붓끝을 입으로 다듬으며 라듐을 반복적으로 섭취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방사능 중독으로 이들은 턱뼈가 썩고, 암에 걸려 고통 속에 죽었다.
기업은 한동안 책임을 부인했고, 진실을 밝히기 위한 법정 투쟁은 수년간 이어졌다.
라듐 걸스의 희생은 산업보건법과 노동자 보호 기준 마련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때 ‘빛나던 시계’는 이후 산업 윤리의 어두운 그림자로 남게 된다.
레베카 스트러더스/ 김희정 옮김/ 생각의힘/ 2만2000원
탐험가 로버트 팰컨 스콧의 회중시계도 독자의 눈길을 끈다.
“전례 없는 가능성이 열린 시대였다.
온갖 종류의 모험(당시에는 모험할 일이 많기도 했다!)과 한때 불가능했던 탐험들이 충분히 가능해진 것이다.
사람들은 미지의 세계를 감싼 미스터리, 어딘가에 세계 최초로 발을 딛는다는 도전, 불가능한 목표를 성취한다는 흥분에 이끌려 인간이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세상의 구석구석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시계 없이는 성취 불가능한 모험이었다.
”(236쪽)

로버트 팰컨 스콧의 회중시계는 인류의 위대한 도전을 함께한 대표적인 시계다.
남극 탐험에 도전한 스콧의 탐험대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캠프에서 불과 약 20㎞ 떨어진 곳에서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다.
스콧 대장의 회중시계 역시 주인이 마지막으로 일기를 쓴 1912년 3월 29일 목요일 이후 깊은 잠에 빠졌다.
저자는 “팀 전체가 얼어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시계를 사용해 잠자는 시간을 제한했다”는 언급을 확인하기 위해 시계와 함께 회수된 스콧 대장의 일지를 세심히 살폈으나 해당 기록은 찾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대원들의 규칙적인 일과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발견한다.
거의 모든 활동이 자세한 시간과 함께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는 그의 회중시계가 아니면 불가능했다.
매일 시계를 관리하고, 태엽을 감아주었다.
주인의 마지막 손길 이후 멈춘 이 회중시계는 그야말로 주인과 함께 잠든 것. 현재 시계를 보관하고 있는 박물관은 이 시계를 수선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시계가 자유를 의미했던 때도 있었다.
19세기 미국 남부, 노예제도 아래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흑인들은 밤에 출발하고, 특정 시간에 은신처를 찾아야 했기에 시계는 필수 도구였다.
노예가 시계를 소지하는 건 금지되었지만, 그것이 곧 ‘자유인의 상징’이라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다.
시계는 그들에게 단순한 기계가 아닌, 독립을 위한 도구이자 희망의 상징이었다.

이처럼 시계는 단순히 시간을 알려주는 기기가 아니라 인간의 시간 인식과 철학, 미학을 담아낸 ‘이동하는 인류학적 유물’이다.
더불어 시간의 지배를 받는 우리가 시간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생각하게 한다.
박태해 선임기자 pth122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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