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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도서관 이야기에 빠져들다

조선 시대 유일한 대학도서관 ‘존경각’
일제, 장서 3만권 약탈… 책 보관소 전락
3·1운동 이후 사상 선도 위해 건립 주도
4·19혁명도서관은 이기붕의 저택 부지
北, 서가 비공개 ‘폐가제’ 방식이 대다수
근현대 주요 사건의 무대 도서관 재조명


이토록 역사적인 도서관/ 백창민/ 한겨레출판/ 2만5000원

“도서관은 진정한 미덕으로 가득한 고대의 유물이, 현혹과 기만이 없는 모든 것이 보존돼 안식하는 신전이다.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이토록 도서관을 칭송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사람이 도서관을 그저 단순한 책 보관소나 대여소, 공부방 정도로 여기는 실정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주요 도서관 상당수는 당대 정치·경제·사회 문화의 영향이 빚어낸 결과물로,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굵직한 사건들의 무대이기도 했다.
성균관 존경각
‘도서관 덕후’인 저자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규모의 해외 도서관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나라 도서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고 한다.
우리 도서관들은 왜 이렇게 비슷비슷하게 생겼는지, 일제 잔재라는 칸막이 열람실이 아직도 남아 있는 이유가 뭔지, 유독 정치·사회 문제와 거리를 두는지 등등 궁금한 것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 나섰다.
국내 500여 도서관을 답사하며 각종 관련 서적과 자료를 뒤졌고, 관계자를 만나 인터뷰를 한 뒤 도서관에 얽힌 이야기를 추려냈다.
백창민/ 한겨레출판/ 2만5000원
책에 따르면, 조선 성종 때인 1475년 성균관에 ‘존경각’이 설치된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유일한 대학도서관이다.
‘경서를 공경히 하라’는 뜻의 ‘존경(尊經)’이란 이름도 성종이 직접 지었다.
조선시대 유생들이 존경각에 와서 읽고 싶은 책을 빌려 가는 방식이었고, 내부엔 책의 관리와 대출·반납을 담당하는 관원도 있었다.
1년에 한 번씩 책의 습기를 햇볕에 말리는 포쇄(曝?)를 시행했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존경각은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 국권을 강탈하면서 단순한 ‘책 보관소’로 바뀌게 됐다.
이후 존경각에 소장됐던 5만여 장서 중 3만여권이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졌다.
옮겨진 장서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고, 조선시대 유일의 대학도서관이라는 정체성도 지켜내지 못했다.

“존경각 책이 흩어져 사라진 것처럼, 조선 왕조를 지탱하던 제도와 기반도 붕괴했다.
고려 국자감 때부터 이어 온 성균관의 빛나는 역사와 전통도 여기서 그쳤다.
옥스퍼드 보들리언 도서관, 케임브리지 렌 도서관,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 도서관처럼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학도서관을 우리가 가질 수 없었던 이유는 이 때문이다.
”(30쪽)
4·19혁명기념도서관
1910년 강제병합 이후 일본은 조선의 학교, 책방, 자택을 수색해 장서를 불태웠다.
조선에서 도서관을 운영하지 않는 정책으로 일관해 온 일제가 도서관을 신설하게 된 것은 1919년 3·1운동이 영향을 미쳤다.
강압적인 무단통치 대신 유화적인 수단으로 바꾸면서 조선총독부가 도서관 건립을 주도하게 됐다.
식민통치에 필요한 자료 수집과 사상 선도를 위해 도서관을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1921년 이범승의 경성도서관에 부지와 건물을 무상 제공했고, 1923년 조선총독부도서관을 만들었다.
해방 이후 조선총독부도서관은 국립도서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당시 근무했던 한국인 직원들은 서고 열쇠를 넘겨받기로 한 상황에서 일본인이 귀중본을 몰래 가져가지 않을까 걱정해 몰래 불침번을 섰다는 기록이 있다.
국립도서관은 1963년 다시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도서관은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와도 맥을 같이한다.
1960년 3월15일 자유당 정권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투표함 바꿔치기, 대리 투표, 득표수 조작 발표 등 다양한 방식의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마산에서 시작된 항의시위에서 다수 사상자가 발생했고, 그 과정에서 행방불명된 마산상업고 김주열군이 27일 만에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인 변사체로 발견됐다.
결국 이 사건이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면서 이승만 대통령도 물러나게 된다.
평양 인민대학습당
“이기붕 일가가 살던 저택은 4·19혁명 유족 단체가 사무실로 사용하다가 4·19혁명도서관이 되었다.
혁명의 도화선이 된 이기붕의 집터가, 혁명기념도서관으로 다시 탄행했다.
혁명을 기념하는 도서관이 자리하기에, 이보다 더 상징적인 곳은 없을 것이다.
”(170쪽)

책을 읽다 보면 근현대사의 중심이 됐던 도서관들이 의외로 우리 주변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책 속에는 전국의 도서관이나 옛터를 답사할 수 있도록 주소와 홈페이지 정보도 함께 실려 있어 훌쩍 도서관을 찾아 떠나고 싶은 느낌도 들게 한다.
하지만 책 속의 도서관 30곳 중 유일하게 지금 가볼 수 없는 곳이 있는데 바로 북한 평양에 위치한 인민대학습당이다.
연면적이 10만㎡로 국립중앙도서관(3만4772㎡)의 약 3배에 달하는, 한반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도서관이다.
북한에서는 인민의 학습을 생각하는 김일성 주석의 은혜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우리나라의 도서관이 자유롭게 열람이 허용된 개가제가 많은 반면, 북한은 서가를 공개하지 않고 책을 빌려주는 폐가제 방식으로 운영하는 곳이 많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해외 사정을 얼마나 담고 있느냐에 따라 공개, 준공개, 비공개로 등급을 분류했다고 한다.
열람이 자유로운 공개 도서와 달리, 준공개 도서는 정해진 곳에서만 볼 수 있고, 비공개 도서는 당위원회 비서의 승인을 얻어야 볼 수 있게 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저자는 도서관이 의외로 가장 정치적이고 역사적 현장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도서관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습에 주목하라고 권한다.
도서관의 빛나는 역사는 과거 도서관에서 벌어진 성과의 축적이고, 반대로 도서관이 지닌 문제는 과거 도서관에서 외면했거나 해결하지 못한 문제점이 누적된 결과라는 것이다.
박세준 기자 3j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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