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브스턴스'에서 왕년의 스타 엘리자베스(데미 무어)는 거울을 자주 본다.
마주한 형상은 반사된 모습으로, 자기를 비추는 허상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거울을 통해서만 자신을 볼 수 있기에, 결국 나라는 존재는 타인의 눈에 비추어진 나의 모습으로 규정된다.
욕망도 다르지 않다.
인간은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늘 무언가를 바라며 산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이를 두고 타자의 욕망이라고 했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바란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은 타자가 욕망하는 대상이 되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아기는 배가 고파 젖을 찾을 때 엄마를 향해 떼를 쓰고 운다.
자라면서 눈치가 조금씩 발달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엄마가 바라는 행동을 한다.
웃기도 하고, 애교를 부리기도 한다.
세상을 알아가는 순간부터 욕망을 채워줄 대상의 마음에 들어야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 있다는 생존본능을 터득한다.
라캉은 이러한 틀에서 벗어나려면 욕망하는 주체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했다.
우리 삶이 소외되지 않기 위한 중요한 작업이라고 강조했다.
'서브스턴스'는 이와 정반대 방향으로 질주해 파멸을 맞는 이야기다.
엘리자베스는 서브스턴스라는 약물을 주사해 더 젊고 섹시한 수(마거릿 퀄리)로 재탄생한다.
해고당한 에어로빅 쇼프로그램에 복귀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애써 되찾은 인기를 맘껏 누리진 못한다.
엘리자베스와 1주일씩 번갈아 가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규칙을 어기면 노화라는 되돌릴 수 없는 벌을 받는다.

그만큼 자기 몸의 주체가 되기 어렵다는 비유적 표현이다.
현대인의 몸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통제력을 벗어나 타인과 사회의 통제 속에 놓인다.
사회가 원하는 몸을 가져야 한다는 관념이 어렸을 때부터 공공연하게 학습된다.
일상 언어는 물론 성형, 다이어트, 건강식품 광고와 같은 미디어를 통해 사회의 시선에 적합한 몸을 가져야 한다는 인식이 내재한다.
그 정점에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극단의 몸매 관리와 전시로 자기만족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다.
타인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기 위해 어떠한 몸을 만들어야 한다면, 그 역시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왜곡된 모습이 아닐까?
데미 무어는 이처럼 인정욕구가 빚어내는 중독 현상을 '서브스턴스'에서 극단적으로 표현했다.
엘리자베스와 흡사한 인생 궤적까지 더해 진정성을 배가했다.
일찌감치 스타 반열에 오른 그녀는 당대 명감독들과 호흡을 맞춰 배우로서도 인정받았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작품에서 뚜렷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고, 잘 가꾼 몸매 같은 가십거리의 소유자로만 빈번하게 조명됐다.
성형중독에 빠졌다는 확인된 바 없는 기사들이 무수히 쏟아져 할리우드에서조차 자성의 목소리가 일었다.

모욕과 상처로 얼룩진 무어에게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보다 자기 돌봄의 철학이 필요하다.
타인의 욕망이나 시선이 아닌 자유의지로 다양한 가치와 모양을 꿈꿀 수 있어야 한다.
이미 그녀는 알고 있는 듯하다.
지난달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뒤 자신을 불안하게 하고 삶에 족쇄를 채우는 방식에서 해방됐다고 고백했다.
더 많은 역할을 맡아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겠다는 다짐이었다.
"30년 전 한 제작자가 나를 가리켜 '팝콘 여배우'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때부터 이런 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제작자의 말이 오랜 시간 동안 날 갉아 먹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연기가 더 발전하지 못할 거라고 믿어버렸다.
그렇게 내 경력이 바닥을 치고 있을 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담하고 기상천외한 대본을 받았다.
바로 '서브스턴스'였다.
그때 우주가 내게 말해줬다.
너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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