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업계는 기온 1도 차이에 따라 마케팅 전략을 재편하고, 패션업계는 계절이 아닌 날씨를 기준으로 상품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날씨 데이터는 이제 기업 전략의 핵심 지표로 자리 잡았습니다.
기후는 환경 이슈를 넘어 산업 전략과 정책 방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핵심 변수수가 됐습니다.
기업들은 '1도 경제'에 대응하기 위해 수요 예측부터 생산·유통까지 전 과정을 날씨에 맞춰 조정하고 있다.
아시아경제는 날씨가 데이터가 된 시대, 산업의 변화를 짚어봤습니다.
"이번 주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평균기온이 평년보다 2도 이상 높습니다.
아이스 음료 프로모션을 확대하고, 컵얼음과 탄산음료의 재고를 선제적으로 확보하겠습니다.
"
서울 강남구 BGF리테일 본사 회의실. 편의점 CU를 운영하는 이곳에서는 매주 월요일 임원회의가 '날씨 보고'로 시작된다.
기상 데이터 담당 임원이 주간 기상 전망을 공유하면, 마케팅·상품기획·물류 부서가 즉각 대응책을 논의한다.
날씨 정보가 경영 전략의 중심에 섰다는 이야기다.
기온 1도 변화에 따라 매출이 민감하게 움직이는 편의점 업계는 이미 기후 대응 시스템을 실전 배치했다.
CU와 세븐일레븐 등은 '상품별 임계온도' 데이터를 별도로 관리한다.
예컨대 기온이 24도를 넘으면 아이스커피, 26도부터는 맥주, 27도는 막대 아이스크림, 31도는 튜브형 아이스크림 매출이 급증하는 식이다.
생수와 스포츠 음료는 29도 이상에서 판매량이 크게 오른다.
세븐일레븐은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올해 천원 맥주 프로모션을 예년보다 한 달 앞당긴 3월에 시작했다.
불과 2주 만에 40만캔이 판매되며 흥행에 성공했다.
기상 데이터 기반 마케팅이 성과로 이어진 대표 사례다.
지난해 월별 맥주 매출 현황에 따르면 4월부터 매출지수가 100을 넘어서기 시작했으며, 여름 절정인 8월 매출지수는 평균값 대비 130 수준까지 상승했다.
매출 지수가 100을 초과하면 매출이 평균보다 높다는 의미이며, 100 미만이면 매출이 그만큼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편의점은 유동인구에 따라 매출이 좌우되는 즉시구매 채널이다.
비가 오면 막걸리, 부침개 재료, 우산이 잘 팔리고, 더우면 냉장 음료와 얼음 제품이 집중적으로 팔린다.
CU는 2001년부터 기상청 정보를 활용한 '날씨정보 활용 시스템'을 운영 중이다.
각 점포의 POS 시스템에 2시간 단위 기상 예보와 판매 데이터가 전송돼, 점주가 이를 바탕으로 당일 발주 수량을 실시간 조정한다.
강남구의 한 CU 점주는 "기온에 따라 주문 수량을 조절해 폐기율도 줄이고 있다"고 말했다.
패션업계는 계절이 아닌 '기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봄=3월, 여름=6월' 등 전통적인 시즌 개념은 이미 무의미해졌다.
짧아진 봄과 가을, 길어진 여름과 뒤늦게 찾아오는 겨울 날씨로 인해 패션업계는 재고 부담에 시달리고 있다.
얼마만큼의 수량으로 언제 제품을 생산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면서 재고가 누적된 탓이다.
지난해에는 이상기후 현상이 극심해지면서 예측이 모두 빗나갔다.
매서운 추위가 올 것이라는 전망에 맞춰 겨울 코트와 패딩 수량을 늘렸던 업체들은 11월까지 기온이 20도를 넘기면서 제때 겨울 외투를 판매하지 못하는 손해를 떠안았다.
1~2월에는 극심한 추위가 찾아왔지만, 늦추위는 소비자들의 소비심리를 자극하지 못했다.
'곧 봄인데 잠깐만 버티자'는 심리로 인해 패션 업체들은 마진을 더 낮춰 제품을 판매해야 했다.
기후로 인한 계절 예측 실패는 재무 지표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한섬은 자산 대비 재고자산 비율이 2023년 25.5%에서 올해 1분기 35.3%까지 상승했다.
신세계인터내셔날도 25.8%로 전년 동기(23.3%)보다 다시 올라섰고, 미스토홀딩스는 여전히 재고자산만 9532억 원에 달하며, 총자산의 16.5%를 차지하고 있다.

패션업계도 기후 위기 대응이 빨라졌다.
한국패션산업협회는 인공지능(AI)을 활용한 날씨 예측 플랫폼 개발을 진행 중이다.
협회에 가입된 패션 업체들이 기상 데이터를 활용해 필요한 부분에 접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박영수 한국패션산업협회 상무는 "많은 산업군 중에 패션만큼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산업은 없을 것"이라며 "날씨 예측에 패션업체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만큼 날씨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는 플랫폼 개발이 필요하다는 부분에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설명했다.
개별 패션기업들은 자체적인 대응을 강화하고 있다.
다품종 소량 생산체제인 여성복은 적시 생산 시스템으로 재고에 대응 중이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의 '스튜디오 톰보이'는 올해 1월부터 매달 혹은 매주 미니 컬렉션 개념으로 제품을 선보이는 '먼슬리 드롭'을 도입했다.
소량 발주 후 판매 진도율을 확인해 재판매 여부를 결정하는 방식이다.
길어진 여름에 대응하기 위해 더 세분된 여름 전략을 세우기도 했다.
삼성물산 패션은 그동안 사계절과 프리시즌(Pre·정규시즌 전)까지 더해 총 8개로 나눠 운영했지만, 올해는 여름을 두 번 더 나눠 총 10개 시즌으로 제품을 운영할 예정이다.
코오롱 FnC는 여름용 반팔과 셔츠 물량을 지난해 대비 2배 더 늘렸다.
LF도 봄, 여름 시즌 상품을 1월 중순으로 한 달가량 앞당겼다.
시기도 앞당겨 2월부터 반팔 제품을 판매 중이다.

백화점들도 패션업계의 이상기후 대응에 힘을 모으고 있다.
이달 초 신세계백화점 영등포점은 6층 스포츠 매장 분위기를 바캉스 시즌으로 전면 교체했다.
통상 6월에 진행되던 바캉스 시즌을 한 달가량 앞당긴 것이다.
신세계백화점 관계자는 "계절 의류의 경우 날씨에 따라 매출이 큰 폭으로 오르내리기 때문에 기획전 및 행사 기간을 날씨 예보에 따라 유동적으로 운영하기로 방침을 정했다"고 말했다.
백화점 바이어들은 패션업체와 회의를 통해 마케팅 시점과 기간을 조율하고, 날씨에 구애받지 않는 사계절 의류를 더 많이 들여오는 방안도 고민 중이다.
패션 매출은 백화점 전체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핵심 영역이다.
그러나 이상기후라는 큰 벽에 부딪히면서 올해 들어 롯데, 신세계 등 주요 백화점의 패션 매출 신장률은 0%대에 머물고 있다.
원재료, 인건비, 물류비 상승으로 제품 가격이 올랐지만, 매출 신장률이 제자리걸음이라는 것은 패션을 소비하는 고객이 크게 줄었음을 의미한다.
패션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유통사들의 마케팅에 맞춰 패션업체들이 제품을 공급하고, 할인행사가 있으면 그 시즌에 맞춰 동참하는 모습을 보였다"며 "기후 위기로 패션업계 전반이 침체에 빠지면서 제조업체부터 유통업체까지 변하고 있다"고 짚었다.
임혜선 기자 lhsro@asiae.co.kr
이민지 기자 mi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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