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남부 지역에 있는 도매형 할인점 '퓨어 골드' 파라냐케점. 21살 안드레아는 주류 코너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소주 가운데 하이트진로의 '참이슬 후레쉬'를 골라 들었다.
안드레아는 일주일에 1~2회 가족과 함께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통해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 소주 '진로'를 마신다.
안드레아는 "K-드라마에서 한국 사람들이 소주를 마시는 모습을 자주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접하게 됐다"면서 "필리핀 술을 마시면 다음 날 두통이 심한 경우가 많지만, 한국 소주는 상대적으로 숙취가 덜해 몸에 더 잘 맞고 깔끔하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퓨어골드 관계자는 "진로는 외국 브랜드지만, 한국 음식점뿐 아니라 일반 가정에서도 데일리 술로 자리 잡고 있다"며 "최근 1~2년 사이 판매 속도가 특히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 소주가 필리핀 일상에 녹아들었다.
한국 드라마와 K-팝이 필리핀 현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콘텐츠 주인공들이 즐겨 마시는 한국 술 소주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면서다.
대표주자는 하이트진로의 '진로'다.
필리핀 주류기업이 진로 가격의 60% 수준인 현지 소주 '쏘나이스'를 생산해 판매하고 있지만, 필리핀 현지인 사이에선 '소주=진로'라는 공식이 자리 잡은 모습이다.
이는 하이트진로가 한인 중심 유통망에서 벗어나 현지 소매와 도매 유통으로 확대한 결과다.
하이트진로는 필리핀 주류 시장의 50% 차지하는 대형마트와 식료품 전문점을 공략하며 진로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퓨어골드뿐만 아니라 세이브모어, SM 슈퍼마켓, 세븐일레븐 등 접근성 높은 채널로 유통망을 다각화하고, 현지 최대 주류 유통사인 '프리미어 와인앤스피릿'과 파트너십을 맺고 전국 400여개 유통 거점을 기반으로 가정 시장으로 파고들었다.

마리 필 레예스(42세) 하이트진로 필리핀법인 MD는 "한국 드라마를 보며 삼겹살과 소주 문화를 접한 소비자들이 많고, 실제로 마셔본 이후 만족도가 높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소비되고 있다"며 "최근에도 현지인들의 한국 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고, 아이유 등 K-팝 가수에 대한 인지도도 높아 한류에 기반한 소주의 확산 효과는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하이트진로는 마닐라 지역에서 6명의 MD 직원을 두고 마트와 편의점 등 가정 시장을 점검하면서 제품 진열 상태와 클레임, 시장 변화 사항들을 파악해 피드백도 받고 있다.
필리핀 중산층이 자주 찾는 회원제 창고형 할인 매장 S&R의 시니어 바이어 니코(25세)는 "소주를 도입하게 된 이유는 K-팝과 한국 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높은 필리핀 시장 특성상 제품에 대한 수요가 확실히 존재해 회원 니즈에 맞춘 대응 차원"이라며 "S&R은 B2B 사업자 회원 비중이 높아 도매상, 소형 슈퍼마켓, 외식업자들이 대량 구매하는 경우도 많다"고 설명했다.

필리핀 소주 열풍은 외식 시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20일 방문한 마닐라의 대형 한식 프랜차이즈 '삼겹살라맛'에서는 테이블 곳곳에서 진로와 함께 식사를 즐기는 현지인들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골디(21세)는 "농구와 같은 스포츠 경기를 보거나 친구들과 파티할 때 소주를 즐겨 먹는다"면서 "삼겹살과 소주의 조합을 특히 좋아한다"고 말했다.
특히 이날 필리핀 현지 힙합 유닛인 'GY'와 취중 라이브 컨셉인 '진로라이브'가 진행돼 현지 젊은 층의 큰 호응을 이끌었다.
진로 라이브는 하이트진로가 국내에서 10년간 운영해온 대표 브랜디드 콘텐츠인 '이슬라이브'를 필리핀 문화에 맞게 현지화한 콘텐츠다.
삽겹살과 소주를 곁들인 술자리에서 다양한 게임과 토크, 라이브 공연 등을 통해 진로에 대한 접근성을 높였다.
또 필리핀 MZ세대가 즐기는 '비디오케' 문화를 접목한 점도 눈에 띄었다.
출연진이 각자의 노래방 애창곡을 부르고 현장 신청곡을 즉석에서 부르는 현지 사교 문화를 반영해 현지 관객과의 정서적 교감을 끌어냈다.
잔을 돌리며 함께 마시거나, '따가이'라는 건배하는 문화, 안주와 술을 곁들이는 '푸루탄' 문화 등 분위기를 중시하는 필리핀 주류 문화에 진로가 완전히 스며든 모습이었다.

그 결과, 하이트진로 필리핀법인의 거래처인 K&L에서 진로의 성장세도 가파르다.
K&L은 마닐라 본사와 세부 등 지사를 두고 한인 식당, 현지 유통업체, 편의점 등에 진로를 공급하고 있다.
K&L은 연간 컨테이너 550~600대를 필리핀에 유통하고 있다.
K&L을 통해서만 1년에 69만3000~75만6000병이 유통되는 셈이다.
강정희 K&L 대표는 "진로는 2018년부터 꾸준하게 연간 약 15% 정도로 계속 성장해 나가고 있다"면서 "과거에는 한국인을 위한 술이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지금은 현지 고객들이 먼저 찾고 있으며, 마케팅을 통해 소비자 경험을 확장시키고, 매장 MD와 현장 브랜딩을 통해 인지도와 회전율을 모두 확보한 드문 사례"라고 평가했다.
마닐라(필리핀)=한예주 기자 dpwngk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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