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같은 땅에서 자란 포도를 이용해 같은 방식으로 양조하고 숙성하더라도 매번 다른 결과물과 마주하게 됩니다.
와인은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우연의 술'입니다.
단 한 번의 강렬한 기억만 남긴 채 말없이 사라지는 와인은 하나같이 흥미로운 사연을 품고 있습니다.
'아경와인셀라'는 저마다 다른 사정에 따라 빚어지고 익어가는 와인 이야기를 하나하나 꺼내 들려 드립니다.

'아콩카과(Aconcagua)'
세계에서 가장 긴 산맥 안데스에서 가장 높게 솟아 오른 봉우리 이름이다.
아콩카과는 원주민 언어인 케추아어 '아콘-카우악(Ackon-Cauak)'에서 유래한 것으로, '돌로 된 파수꾼'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7000m에 육박하는 고도와 눈으로 가득한 이 바위산은 이름만큼 등정이 쉽지 않다.
실제로 21세기 이후 등정에 실패하고 목숨을 잃은 이가 수십명에 달한다.
프리미엄 칠레 와인의 개척자 에두아르도 채드윅(Eduardo Chadwick)은 2002년 1월 와인 한 병을 들고 아콩카과 등반에 나선다.
그가 험준한 대륙 최고봉에 목숨까지 걸고 와인을 짊어지고 올라간 것은 자신의 와인이 아콩카과의 봉우리처럼 우뚝 서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였다.
그가 마침내 정상에 올랐을 때 그의 손에는 '돈 막시미아노(Don Maximiano Founder's Reserve)'가 들려있었다.

돈 막시미아노의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200년 가까이 거슬러 올라간다.
1832년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Santiago)에서 태어난 돈 막시미아노 에라주리즈(Don Maximiano Errazuriz Valdivieso)는 구리 광산업을 통해 큰 돈을 번 사업가였다.
당시 구리는 칠레에서 가장 중요한 천연자원 중 하나였고, 그의 회사는 한때 전 세계 구리 생산량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번성했다.
그는 공직 생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이었다.
25세에 하원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한 이후 9년간 상원의원을 지냈고, 칠레 정부를 대표해 미국과 영국에서 외교관 업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던 돈 막시미아노는 이후 와인 산업으로 영역을 확대한다.
19세기 후반은 프랑스 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되며 칠레의 와인 산업이 태동하던 시기였다.
당시 프랑스 이민자들과 칠레 1세대 와인 생산자들은 보르도(Bordeaux)와 유사한 산티아고 부근의 마이포 밸리(Maipo Valley)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돈 막시미아노는 마이포 밸리에 만족하지 않고 최고의 땅에서 최고의 와인을 얻을 수 있다는 신념 아래 더 나은 부지를 찾아 나섰다.

최고의 떼루아를 찾아 헤맨 끝에 그의 눈이 향한 곳은 아콩카과산이 올려다보이는 아콩카과 밸리(Aconcagua Valley)였다.
산티아고에서 북쪽으로 100㎞가량 떨어진 아콩카과 밸리는 이른 오후에는 산에서 해안 방향으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 더운 공기를 식혀주고, 저녁에는 강 하구에서 올라오는 바닷바람이 안데스산맥의 서쪽 산기슭을 서늘하게 식혀준다.
아콩카과 떼루아에 매료된 돈 막시미아노는 1870년 팡케우에(Panquehue)에 총 300헥타르(ha) 규모의 포도밭을 조성하며 '비냐 에라주리즈(Vina Errazuriz)'의 운영을 시작한다.
돈 막시미아노는 칠레 생산자로는 처음으로 프랑스를 방문해 직접 포도 품종을 선별해 들여와 식재하는 등 양질의 와인 생산을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이후 그의 아들 라파엘 에라주리즈는 포도밭을 700ha까지 늘렸는데, 이는 당시 단일 소유주가 보유한 세계 최대 규모의 와이너리로 기록돼 있다.

15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에라주리즈를 칠레 최고 와이너리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돈 막시미아노의 5대손이자 현 소유주인 에두아르도 채드윅 회장이다.
하지만 그가 가업을 계승하기 위해 와이너리에 처음 합류한 1983년 당시에는 대학을 갓 졸업한 스물넷의 풋내기였다.
무엇보다 엔지니어링을 전공해 와인에 대해선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던 그는 프랑스 보르도로 건너가 저명한 양조가 에밀 페이노(Emile Peinaud) 밑에서 배우며 자신만의 양조 기술과 철학의 토대를 다지는 데 집중한다.
와인 종주국에서의 배움과 경험을 안고 칠레로 돌아와 만든 와인이 바로 보르도 스타일의 아이콘 와인 '돈 막시미아노'다.
에두아르도는 칠레를 세계적인 와인 명산지로 만들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돈 막시미아노 외에도 다양한 고품질의 와인 양조에 매진한다.
그가 양조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할 무렵 칠레 와인 업계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토대로 품질을 끌어올리던 시기였다.
1990년대 이후수출을 시작하며 국제적인 인지도를 점차 확대했다.
하지만 국제 와인시장에서 칠레의 이미지는 여전히 낮은 인건비를 바탕으로 저가의 벌크와인을 생산하는 나라였고, 칠레와 고급 와인을 연결짓는 이들이 드물었다.
칠레 와인의 잠재력에 대해 누구보다 깊은 확신을 가지고 있던 에두아르도 회장에게 세간의 인식은 선입견이자 품질 향상에 전심 전력을 다하게 하는 동력이었다.

에두아르도 회장은 결국 칠레 와인에 대한 편견을 깨부수기 위해 과감한 도전에 나선다.
'베를린 테이스팅(The Berlin Tasting)'이었다.
베를린 테이스팅은 1976년 미국 와인이 프랑스 와인의 자존심을 꺾은 '파리의 심판(Judgment of Paris)'에서 영감을 받아 기획된 이벤트로 가장 전문적이고 공정한 와인 평가 방법론 중 하나로 인정받는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통해 비냐 에라주리즈의 와인을 소개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받기 위해 개최됐다.
베를린 테이스팅은 파리의 심판을 주관했던 영국의 와인 전문가 스티븐 스퍼리어(Steven Spurrier)가 똑같이 기획을 맡아 2004년 독일 베를린 리츠칼튼 호텔에서 진행됐다.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칠레의 고급 와인은 보르도 그랑 크뤼 와인과 이탈리아의 슈퍼 투스칸 등 세계적인 와인들과 맞붙었고, 결과는 놀라웠다.
비냐 에라주리즈의 '비녜도 채드윅(Vinedo Chadwick)'과 '세냐(Sena)'가 1위와 2위를 차지했고, 돈 막시미아노는 세계 10대 와인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에도 18개국에서 22번의 블라인드 테이스팅이 추가로 진행됐는데, 이 가운데 20개 행사에서 칠레 와인은 상위 3위 안에 들었다.
특히 돈 막시미아노는 5개 행사에서 1위를 차지하며 투어 기간 가장 많은 1위를 기록했다.

베를린 테이스팅은 비냐 에라주리즈뿐만 아니라 칠레 와인 업계에도 중요한 이정표가 됐다.
이전까지 글로벌 와인업계는 칠레 와인을 고급 와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강했지만 베를린 테이스팅을 기점으로 업계의 인식은 완전히 달라졌다.
베를린 테이스팅은 칠레 와인이 세계 최고 수준의 고급 와인들과 최고 수준으로 경쟁할 수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행사였고, 칠레가 세계적인 고품질 와인 생산국이라는 이미지를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됐다.

비냐 에라주리즈의 플래그십 와인인 돈 막시미아노의 포도밭이 있는 아콩카과 밸리는 아콩카과 산과 강 유역에 펼쳐져 있는 와인 산지다.
아콩카과 밸리는 연간 240~300일 이상 맑은 날이 지속돼 일조량이 풍부하고 건조한 지역이다.
하지만 서쪽 해안산맥의 좁은 계곡을 통해 차가운 해풍과 동쪽 안데스산맥의 차가운 냉기가 유입돼 일교차가 크게 발생해 포도 생장기에 적절한 기후 조건을 제공한다.
이로 인해 농축미가 뛰어나고 알코올 도수와 타닌이 높은 와인이 생산된다.
미세 기후는 내륙 쪽의 매우 덥고 건조한 기후와 해안 연안의 계곡 쪽의 서늘한 기후로 나뉜다.
내륙 쪽에선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을 중심으로 메를로(Merlot), 시라(Syrah), 카르메네르(Carmenere) 등의 품종이 재배된다.
전통적으로 레드 와인 생산 지역이었던 만큼 오랜 기간 카베르네 소비뇽이 지배적인 품종이었지만 최근 시라와 함께 카르메네르의 재배도 확대되고 있다.
해안 연안의 계곡 쪽에선 샤르도네(Chardonnay)와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 피노 누아(Pinot Noir) 등이 재배된다.
비냐 에라주리즈는 신선하고 복합적인 과일 풍미를 더하기 위해 비옥한 계곡 바닥보다는 경사면이나 해안 방향 부지를 중심으로 포도를 재배하고 있다.

비냐 에라주리즈를 대표하는 돈 막시미아노는 출시 초반에는 카베르네 소비뇽만을 이용해 만들어졌지만 떼루아에 대한 심화 연구를 기반으로 토양과 미세기후 등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며 2000년대 이후에는 카르메네르와 시라, 말벡(Malbec), 프티 베르도(Petit Verdot), 카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 등 다양한 품종들이 블렌딩되고 있다.
'돈 막시미아노 파운더스 리저브 2021(Don Maximiano Founder's Reserve 2021)'은 카베르네 소비뇽 63%, 말벡 22%, 카르메네르 8%, 프티 베르도 7%가 블렌딩됐다.
2021년은 적당히 서늘한 해로 길고 느린 숙성이 가능했고, 그 결과 강렬한 색상과 복합적인 향, 매끄럽게 익은 타닌을 가진 신선하고 우아한 와인이 만들어졌다.
와인은 부담스럽지 않은 13.5도(%)의 알코올 도수와 함께 강렬한 자줏빛의 외관을 가지고 있다.
코에서는 블루베리, 신선한 딸기, 블랙베리 향이 느껴지며, 육두구와 카라멜, 바닐라의 부드러운 노트가 감싸준다.
입안에서는 잘 익은 블루베리, 비터 초콜릿, 블랙 체리가 느껴지며 담배, 로즈메리, 약간의 감초의 섬세한 힌트가 동반된다.
넓고 깊은 시작과 함께 부드러운 타닌이 섬세함과 뛰어난 지속성을 제공한다.

돈 막시미아노와 더불어 에라주리즈의 포트폴리오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와인이 '카이(Kai)'다.
칠레 원주민인 마푸체스(Mapuches)족의 언어로 '식물'을 뜻하는 카이는 카르메네르를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와인이다.
카르메네르는 보르도가 원산지이지만 지금은 보르도에선 자취를 감췄고, 칠레의 대표 품종으로 인식되고 있다.
카르메네르로 만든 와인은 후추 같은 매콤한 향신료 향이 특징이다.
덜 익은 포도로 만들면 톡 쏘는 피망 등의 풍미가 나지만 잘 숙성된 와인에선 초콜릿과 커피, 시가 등의 향이 난다.
카이 2021년 빈티지는 카르메네르 85%에 시라 11%, 말벡 4%가 더해져 만들어졌다.
와인은 잘 익은 검은 과일과 붉은 과일의 풍부한 향과 함께 미네랄 강도에 의해 강조되는 미묘한 비터 초콜릿 노트가 특징이다.
초콜릿 외에도 블랙베리, 블루베리 향과 함께 후추, 파프리카, 향 등의 강렬한 스파이스 향, 신선한 무화과, 로스팅된 커피콩 향이 느껴진다.
입안에서는 올리브, 신선한 무화과, 블루베리가 나타나며 육두구, 화이트 페퍼, 로스팅된 붉은 피망의 가벼운 터치가 동반된다.
산도가 좋고 입안을 감싸는 부드러운 타닌을 지닌 복합적인 카르메네르 와인이다.

구은모 기자 gooeunm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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