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같은 건 없을 때가 많다.
접시는 하얗고
홍옥은 붉고
물방울은 껍질을 타고 미끄러진다.
핏방울처럼 보일 법도 한데
홍옥과 물은 섞이지 않는다.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면
충분히 설명할 수도 있지만
굳이?
쪼개진 과육이 하얗게 미쳐 있다.
작은 창문이 갈변하는 햇빛을 쪼개고 있다.
오늘은 견딜 만한 하루였다.
차가운 손가락이 견딜 만한 통증을 부르고
견딜 만한 크기로 빨갛게 부풀었다 되돌아온다.
그러나
입안 가득 들어차는 사과 향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주제에
어떻게 이리 묵직할 수 있어 어떻게 이리
달콤할 수 있어
칼끝으로 과육을 찍어 입에 넣는다.
이유 같은 건 없을 때가 더 많아서
손끝에 피가 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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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로운 몸과 마음을 가까스로 견딜 때. 가만히 앉아 과일을 깎고 쪼개고 하얀 과육을 입에 넣어 우물거려 볼 것. 놀랍도록 달콤한 맛. 천천히 음미하다 보면 그럭저럭 괜찮다 여겨지기도 한다.
진창의 일들이 잠시 잊히기도 한다.
신기하게도….
죽고 싶다가도 곧장 다시 살고 싶어지는 마음. 이유 같은 건 없다.
무슨 이유가 필요할까. 늘 어떤 이유가 있어서 사는 건 아니듯이. 사는 데 뚜렷한 이유가 없다는 말은 어떤 면에서 이유가 너무 많다는 말이기도 할 테다.
심장의 박동과 피의 뜨거움, 이 또한 명백한 이유일 수 있듯이. 그저 힘을 모아 다시금 주먹을 꽉 쥐어 보는 것이다.
지금 시장에는 생기로운 여름 과일이 가득하다.
빛은 쨍하고 붉다.
도무지 빈손, 빈 마음일 수 없게 한다.
박소란 시인